기념일 ‘애국’ 넘어 365일의 기억으로…기업 역사 마케팅 시험대
- 스타벅스 ‘탱크데이’ 논란 후 대표 경질·글로벌 본사 사과…후손 장학사업 재개
- 빙그레·KB금융·CU·모나미·쿠팡, 역사 콘텐츠와 기부·후손 지원 결합
- 진정성 판가름할 새 기준은 역사 고증·사업 지속성·수혜자 보호
광복절을 전후해 태극기와 독립운동가를 앞세운 기업 마케팅이 쏟아지고 있다. 한정판 상품을 판매하는 데서 출발한 ‘애국 마케팅’은 독립운동가의 기록을 복원하고 후손의 학업과 생업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활동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스타벅스의 ‘5·18 탱크데이’ 사태는 기업의 역사 마케팅이 특정 기념일에만 애국을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기업이 역사를 브랜드 자산으로 활용하려면 광복절 하루의 캠페인보다 연중 이어지는 ‘역사적 기억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업이 다른 역사적 사건과 피해자의 아픔에는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면 장기간 쌓아온 사회공헌 활동도 한순간에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스타벅스코리아는 지난 5월 18일 텀블러 판매 행사에 ‘탱크데이’와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거센 비판을 받았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탱크를 전면에 내세우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당시 당국의 해명을 연상시키는 문구까지 사용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스타벅스는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했으며, 신세계그룹은 손정현 당시 스타벅스코리아 대표와 담당 임원을 해임했다. 스타벅스 글로벌 본사도 5·18 관련 단체에 이번 일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부적절한 마케팅”으로 규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내부 통제와 규범 심의, 임직원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재발 방지 방안도 내놨다.
논란의 불똥은 스타벅스가 2015년부터 이어온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사업으로 번졌다. 국가보훈부가 협력 사업을 재검토하면서 예년보다 장학생 모집이 늦어졌고 사업 중단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이후 보훈부는 장학금의 실질적인 수혜자가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점을 고려해 올 하반기 사업을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스타벅스는 지난 11년간 독립유공자 후손 483명에게 누적 10억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2024년과 2025년에는 각각 후손 50명에게 1인당 200만원씩 총 1억원을 전달했다. 독립문역점에서 상품이 판매될 때마다 일정 금액을 적립하는 이익공유형 매장 운영도 장학사업의 재원으로 활용됐다.
이번 재개 결정은 스타벅스의 마케팅 잘못에 대한 책임을 없애준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기업의 역사 인식 실패에는 분명하게 책임을 묻되, 그 책임이 잘못과 무관한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전가돼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판단에 가깝다. 기업 제재와 공익사업 수혜자 보호를 분리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도 남겼다.
최근 기업들의 역사·애국 마케팅은 상품에 태극기를 붙이는 방식에서 한층 확장되고 있다. 빙그레는 독립운동가의 잃어버린 일상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차별화된 캠페인을 이어왔다. 2024년 ‘처음 입는 광복’에서는 옥중에서 순국해 죄수복 차림의 사진만 남은 독립운동가 87명의 모습을 인공지능(AI)으로 복원해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재현했다.
2025년에는 역사 자료와 독립유공자 후손의 증언을 바탕으로 1945년 광복 당시의 만세 함성을 AI로 구현한 ‘처음 듣는 광복’을 선보였다. 복원한 소리는 백범김구기념관에 기증해 교육 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 단순 광고 영상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결과물을 남겼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KB금융의 ‘대한이 살았다’도 장기 캠페인의 대표 사례다. 2019년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 수감됐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노래에 새로운 선율을 입히며 시작한 뒤 독립운동 유적지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지속해서 조명했다. 2026년에는 국민이 직접 노랫말과 노래 제작에 참여하는 ‘다시 쓰는 대한이 살았다’로 캠페인을 확장했다. 영상 공유와 좋아요에 따라 기부금을 조성해 독립유공자 후손 소상공인을 지원하는 구조도 마련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일상적인 소비와 역사 교육을 연결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CU는 올해 광복절을 맞아 몽골에서 의료 활동과 독립운동을 펼친 대암 이태준 선생을 알리는 ‘태극기 간편식’을 출시했다. 상품 포장에 이태준 선생의 생애를 소개하는 정보무늬(QR코드)를 넣고, 제품 한 개가 팔릴 때마다 100원을 적립해 몽골 울란바타르 이태준 기념공원에 전달하기로 했다.
모나미는 윤동주·안중근·이육사·유관순의 정신을 담은 ‘BP153 광복 81주년 에디션’을 선보이고 판매 수익금 전액을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에 기부한다. 대표 상품인 볼펜을 역사를 기억하는 매개체로 활용하면서 판매와 기부를 직접 연결한 사례다.
쿠팡은 광복회에 장학기금 1억원을 전달해 독립유공자 후손 60명의 학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대학생 20명에게는 각각 300만원, 고등학생 40명에게는 각각 100만원이 지급된다. 특정 상품 판매보다 후손에게 필요한 지원을 직접 제공하는 사회공헌형 접근이다.
이들 사례는 기업의 역사 마케팅이 크게 네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태극기와 기념 문구를 상품에 적용하는 데 머물렀지만, 이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소개하는 역사 콘텐츠로 확대됐다. 최근에는 소비자가 직접 참여해 기부금을 만들거나 독립유공자 후손의 교육·주거·생업을 장기간 지원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다만 좋은 취지와 화려한 콘텐츠만으로 진정성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루려면 전문가의 고증이 필요하고, 상품 판매로 발생한 수익이 누구에게 얼마나 전달됐는지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일회성 캠페인이 다음 해에도 이어지는지, 논란이 발생했을 때 수혜자를 보호하면서 기업이 책임지는 구조를 갖췄는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스타벅스 사태는 여러 단계의 마케팅 승인 절차가 있더라도 조직 안에 역사적 맥락을 점검할 역량이 없다면 사고를 막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줬다. 날짜와 문구, 이미지가 사회적 비극이나 피해자를 연상시키는지를 검토하는 별도의 절차와 외부 전문가 자문이 필요하다. 마케팅 담당자 개인의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주요 역사 기념일과 관련 표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내부 기준도 갖춰야 한다.
기업이 역사에서 상품의 이야기만 빌려오고 그 역사를 지키는 책임은 외면한다면 애국 마케팅은 상업적 포장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반대로 정확한 고증과 장기 지원, 투명한 기부, 일관된 조직문화가 결합된다면 기업은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새로운 교육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앞으로 소비자들은 어느 기업이 광복절에 태극기를 더 크게 내거는지만 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평범한 날에도 역사적 아픔을 존중하는지, 캠페인이 끝난 뒤에도 후손과 유적지를 지원하는지, 실수가 발생했을 때 누구를 보호하고 어떻게 책임지는지를 함께 살피게 된다. 애국 마케팅의 진정한 경쟁력은 애국을 얼마나 크게 외치느냐가 아니라 역사를 얼마나 오래, 정확하게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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