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AI 시대의 경쟁력이 될 수 있을까…문자의 강점을 산업의 힘으로 바꾸는 조건
- 규칙적인 자모 결합은 디지털 처리의 기반…한국어 이해와 AI 성능은 별개의 과제
- 데이터 품질·처리 효율·문화적 맥락이 한국어 AI의 실질 경쟁력 좌우
- 한류의 관심을 교육·번역·산업 서비스로 연결하고, 누구나 쓰는 AI 환경 마련해야
한글날을 맞아 우리말 브랜드가 뉴욕 전광판에 등장하고 기업들이 한글 서체와 체험 행사를 선보였다. 한글은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문화 자산이자 소비자와 만나는 디자인 언어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지식을 찾고 문서를 작성하며 업무를 수행하는 시대에는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이 필요하다. 한글의 강점은 AI 산업에서도 경쟁력이 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결합하는 문자 체계이며, 한국어에는 산업 현장과 생활에서 축적된 지식이 담겨 있다. 다만 문자의 체계성이 AI 성능을 자동으로 높여주지는 않는다. 글자를 처리하는 기술,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모델, 이를 이용해 가치를 만드는 서비스가 함께 발전해야 한다.
한글의 미래 경쟁력은 문자를 기리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어로 축적한 지식을 AI가 정확하게 활용하고 시민이 자신의 말로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데서 찾아야 한다.
한글의 규칙성, 디지털 처리의 유리한 출발점
한글의 특징은 개별 자모를 결합해 음절을 만든다는 데 있다. ‘한’이라는 글자는 초성 ‘ㅎ’, 중성 ‘ㅏ’, 종성 ‘ㄴ’으로 나눌 수 있다. 음절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다루거나 구성 요소로 분해하는 방식 모두 가능하다.
유니코드 표준에는 현대 한글의 조합형 음절 1만1172개가 포함돼 있다. 이들은 초성 19개, 중성 21개, 종성 없음까지 포함한 28가지 경우의 조합으로 계산된다. 모든 조합이 실제 단어나 발음으로 사용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음절을 규칙적으로 구성하고 분해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구조는 문자 입력과 검색, 글꼴 구현 등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다. AI 개발에서도 음절과 자모 가운데 어떤 단위를 사용할지 선택하거나 함께 활용하는 연구가 가능하다. 다만 자모로 잘게 나누면 처리할 단위가 늘어날 수 있어, 분해 자체를 효율 향상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문자 구조는 기술 설계에 활용할 자산이다. 실제 이익은 어떤 데이터와 처리 방식을 결합하고, 어떤 작업에서 성능을 확인하느냐에 달려 있다.
글자를 읽는 AI와 한국어를 이해하는 AI는 다르다
한글과 한국어는 구분해야 한다. 한글은 문자를 적는 체계이고, 한국어는 어휘와 문법, 상황에 따른 의미를 가진 언어다. 한글을 정확히 출력하는 AI라고 해서 한국어의 맥락까지 충분히 이해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어에서는 조사와 어미가 문장의 관계와 태도를 바꾼다. ‘검토하겠습니다’와 ‘검토했습니다’는 행동의 시점이 다르고, ‘가능합니다’와 ‘가능할 수 있습니다’는 확실성의 정도가 다르다. 대화에서는 주어가 생략되기도 하며, 같은 표현도 상대와 상황에 따라 요청이나 완곡한 거절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산업 현장에서 중요한 차이다. 고객 상담 AI가 정중한 문장을 만들어도 요청의 핵심을 놓치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업무 문서에서 계획과 완료를 혼동하면 의사결정에 오류를 줄 수 있다. 자연스러운 말투와 정확한 업무 수행은 함께 평가해야 한다.
한국어 AI의 기회는 이러한 세부 맥락을 실제 서비스에서 다루는 데 있다. 국내 개발사가 현장에 접근하기 유리할 수는 있지만, 그 사실만으로 글로벌 모델보다 우수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같은 업무와 조건에서 검증해야 한다.
AI 처리 비용, ‘글자 수’보다 중요한 토큰
AI가 문장을 처리할 때 사용하는 단위는 우리가 보는 글자나 단어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많은 언어모델은 텍스트를 ‘토큰’이라는 조각으로 나눠 학습하고 답변을 생성한다. 이를 나누는 도구가 토크나이저다.
한국어 문장을 얼마나 잘게 나누는지는 모델의 어휘 구성과 학습 자료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내용도 지나치게 많은 토큰으로 분리되면 처리해야 할 문장이 길어진다. 이는 생성 시간과 메모리 사용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토큰 단위 과금 서비스에서는 비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한글은 짧게 쓰이므로 AI에서도 항상 저렴하다’거나 ‘한국어는 영어보다 언제나 비효율적이다’라는 설명은 모두 충분하지 않다. 모델과 문장의 종류, 토크나이저를 함께 확인해야 한다.
2026년 7월 수정 공개된 Thunder-Tok 연구는 토큰 분할 방식의 개선 가능성을 보여준다. 연구진은 실험 조건에서 기존 BPE 방식과 비교해 한국어의 토큰 분할 수를 약 9% 줄이면서 경쟁력 있는 성능을 유지했다고 보고했다. 특정 연구의 결과를 모든 서비스에 적용할 수는 없지만, 처리 효율이 언어의 숙명보다 기술 설계의 과제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업이 한국어 AI를 선택할 때도 벤치마크 점수만 볼 일은 아니다. 실제 문서를 처리하는 시간과 비용, 답변의 정확도, 사람이 수정해야 하는 양을 함께 비교해야 한다.
한국어 지식의 경쟁력은 데이터의 품질에서 나온다
AI가 한글로 유창하게 답하는 것과 한국 사회의 제도와 산업 지식을 정확하게 다루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한국어로 작성된 자료를 많이 모으는 것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자료가 최신인지, 서로 충돌하는 내용은 없는지, 특정 집단의 경험만 반영하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
한국어 평가도구 KMMLU는 이러한 문제를 보여준다. 연구진은 영어 문제의 번역본에 의존하지 않고 한국의 원래 시험 문제를 활용해 45개 분야, 3만5030개의 문항을 구성했다. 논문은 약 5분의 1의 문항에서 한국 문화와 관련된 지식이 정답 해결에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이 결과를 현재 AI 모델 전체의 성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능력을 평가할 때 한국의 지식과 맥락을 직접 검증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번역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과 실제 한국어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것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국립국어원은 ‘모두의 말뭉치’를 통해 언어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올해 9월에도 3분기 공개·활용 안내를 게시했다. 이런 공공 언어자원은 기업과 연구기관이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다.
여기에 산업별 전문자료와 실제 질문, 수정된 답변을 적절한 권한 아래 축적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료의 출처와 작성 시점, 이용 조건이 명확해야 하고 개인정보와 창작자의 권리도 고려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갱신할 수 있는 데이터 생태계가 장기 경쟁력의 토대다.
국내 모델의 도전, 한국어 특화와 세계 지식의 결합
국내 기업들도 한국어와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AI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올해 공개한 HyperCLOVA X 32B Think 기술보고서에서 한국어·문화 맥락의 추론과 시각 정보 이해, 도구 사용 능력을 주요 개발 방향으로 제시했다.
LG AI연구원의 K-EXAONE 기술보고서는 한국어를 포함한 6개 언어 지원과 추론·도구 사용·한국어 평가를 함께 다룬다. 두 사례는 한국어 경쟁력을 확보하는 작업이 일반 지식과 다국어 능력, 실제 업무 수행 역량의 확장과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어를 잘하는 모델도 해외 기술 문서와 연구 성과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세계 지식을 많이 학습한 모델도 한국어 사용자의 질문과 현장 조건을 정확히 해석해야 한다. 한국어 특화와 글로벌 역량은 함께 갖춰야 할 요소다.
기업이 발표한 평가 결과는 비교 모델과 측정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실제 경쟁력은 고객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서비스에서 확인돼야 한다. 한국어라는 이유만으로 선택받기보다, 한국어 업무를 더 정확하고 경제적으로 해결해 선택받는 구조가 필요하다.
한류의 관심을 배움과 서비스의 시장으로
한글에 대한 해외 관심은 한국어 교육과 번역, 콘텐츠 서비스의 기회로 연결할 수 있다. AI는 학습자의 질문에 맞춰 표현을 설명하고 글을 고쳐주거나, 콘텐츠 속 대사를 이해하도록 돕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다만 학습 가치가 발음과 문법 교정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에 맞는 높임 표현, 상황에 따른 말투,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는 기능까지 갖춰야 한다. 번역도 단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수준을 넘어 인물의 관계와 유머, 표현의 분위기를 전달해야 한다.
한국어 서비스가 축적한 기술과 운영 경험을 다른 언어 시장으로 확장하는 전략도 가능하다. 데이터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분야를 보완하고, 지역의 지식과 문화를 평가에 반영하며, 적은 비용으로 현장에 적용하는 방법은 다른 언어권에서도 활용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류에 대한 관심이 곧바로 서비스 매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학습 효과와 번역 품질, 사용 편의, 창작자와의 협력 조건이 뒷받침돼야 한다. 관심을 일회성 체험에서 지속적인 이용으로 바꾸는 일이 사업의 과제다.
우리말로 이용할 수 있어야 기술의 혜택도 넓어진다
AI 시대 한글의 가치는 산업 경쟁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민이 자신의 말로 정보에 접근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복잡한 명령어나 외국어 표현을 익혀야만 AI를 활용할 수 있다면 기술의 혜택은 고르게 퍼지기 어렵다.
일상적인 말로 질문해 공공 안내문을 쉽게 이해하고, 작은 사업자가 상품 설명과 고객 응대에 도움을 받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고령자의 말투와 다양한 지역 표현, 비표준적인 발화를 다룰 수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이는 상용 서비스에 요구되는 평가·개발 과제다.
접근성은 문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국립국어원은 한국어와 한국수어를 연결하는 병렬 말뭉치를 제공한다. 한국수어를 한국어 문장의 단순한 몸짓 표현으로 취급하지 않고, 고유한 언어 구조를 존중하며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사람의 말과 표현을 폭넓게 다루는 AI는 생활 속 불편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한글의 경쟁력을 평가할 때 누구의 언어 경험까지 서비스에 포함했는지도 살펴야 하는 이유다.
문자의 자부심을 넘어, 지식을 활용하는 힘으로
앞으로의 과제는 연결에 있다. 공공기관은 활용 조건이 명확한 언어자원과 평가 기반을 마련하고, 기업은 실제 업무에서 품질과 비용을 검증해야 한다. 연구기관은 한국어 처리 효율과 맥락 이해를 개선하고, 콘텐츠·교육 분야는 창작과 학습의 가치를 살리는 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한다.
평가 기준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답변이 유창한지뿐 아니라 근거가 있는지, 시간과 비용을 줄였는지, 사람이 얼마나 수정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표준적인 문장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도 충분히 도움을 받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한글의 규칙적인 구조와 한국어에 축적된 지식은 유리한 출발점이다. 이를 경쟁력으로 만드는 것은 데이터와 기술,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다.
AI 시대 한글의 미래는 한국어로 축적한 지식을 더 정확하게 활용하고, 세계와 더 깊이 소통하며,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말로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데 달려 있다. 오래된 문자 자산을 새로운 산업과 생활의 힘으로 전환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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