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나우] 혀를 자극하던 매운맛, 이제 팬덤을 달군다…‘스파이시 콘텐츠’의 부상
- 삼양라운드스퀘어 ‘번트’, 태권도·데이트·미국 로컬 문화로 콘텐츠 확장
- Z세대의 도전·공유 욕구와 만나 매운맛이 놀이·정체성·소통 수단으로 진화
- ‘더 맵게’보다 맛의 다양성·현지화·안전성을 갖춘 문화 생태계 구축이 관건
매운맛이 식품의 감각적 특성을 넘어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다. 소비자가 매운 음식을 단순히 먹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반응을 촬영해 공유하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흐름이 확산하고 있다. 식품업계의 경쟁 무대도 제품 개발과 유통망에서 영상·체험·팬덤으로 넓어지는 모습이다.
삼양라운드스퀘어가 매운맛 콘텐츠 브랜드 ‘번트(BURNT)’의 오리지널 시리즈를 확대하는 것도 이러한 변화를 겨냥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번트는 기존 콘텐츠 채널 ‘존맛(JOHNMAAT)’을 개편해 지난 5월 선보인 이른바 ‘스파이시 미디어 하우스’다. 특정 제품을 알리는 광고 채널을 넘어 매운맛을 소재로 한 예능과 체험, 도시문화 콘텐츠를 자체적으로 제작한다.
새 시리즈 ‘캔 유 핸들 더 번(Can you handle the Burn)’은 태권도·중창·탁구·사격 분야 전문가들이 강한 매운맛을 경험한 상태에서도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매운 음식을 먹는 행위를 스포츠와 공연, 긴장감 있는 도전 서사에 결합한 것이다.
또 다른 시리즈 ‘파이어 오어 파이어드(Fire or Fired)’는 매운맛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삼양라운드스퀘어 소속 PD가 뉴욕·내슈빌·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6개 도시의 매운맛 문화를 경험하는 과정을 총 8회에 걸쳐 담는다. 앞서 선보인 ‘스파이시 블라인드 데이트’는 매운 음식을 먹으며 싱글들이 가치관을 확인하도록 구성했다. 매운맛이 능력 시험과 여행, 연애라는 서로 다른 장르를 연결하는 공통 언어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젊은 소비층의 ‘경험 소비’가 있다. 미국 마케팅 기업 쿼드가 소개한 루빅스푸즈 조사에서는 Z세대 응답자의 78%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답했고, 66%는 ‘매운 제품’이라고 홍보된 식품을 구매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밝혔다. 매운맛은 강렬한 감각을 짧은 시간 안에 제공하면서 영상 속 표정과 반응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유튜브·틱톡·인스타그램 등 숏폼 중심의 소셜미디어와도 궁합이 좋다.
과거의 매운맛 경쟁이 스코빌지수와 고추 함량을 앞세운 ‘더 센 맛’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즐기는 방식이 세분화되고 있다. 매운맛에 단맛을 결합한 ‘스위시(Swicy)’, 과일의 산미를 더한 매운 소스, 칠리크리스프와 핫허니처럼 질감과 향을 강조한 제품들이 대표적이다. 소비자도 무조건 강한 자극보다 달고 맵거나, 새콤하고 맵거나, 향신료의 풍미가 살아 있는 입체적인 맛을 찾기 시작했다.
매운맛은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일종의 ‘소셜 화폐’로도 바뀌고 있다. 어떤 제품의 몇 단계까지 견딜 수 있는지, 누구와 함께 도전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리했는지가 온라인에서 이야기와 밈을 만들어낸다. 매운맛을 잘 먹는 능력은 모험심과 개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고, 도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솔직한 표정과 돌발 반응은 국적과 언어가 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된다.
불닭 브랜드의 성장은 이 같은 ‘참여형 매운맛’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 사례다. 삼양식품은 2020년 6485억원이던 매출이 2024년 1조7280억원으로 약 2.7배 증가했고, 같은 기간 수출 비중도 57%에서 77%로 확대됐다. 제품 판매가 글로벌 소비자와의 첫 접점을 만들었다면, 번트는 그 접점을 지속적인 시청과 참여, 팬덤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특히 기업이 자체 콘텐츠 브랜드를 운영하면 신제품 출시 때마다 광고비를 투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세계관과 팬 커뮤니티를 축적할 수 있다. 영상 속에서 발견한 매운맛과 도시, 인물, 음악이 다시 제품 구매와 오프라인 체험으로 이어지는 선순환도 기대할 수 있다. 식품기업이 제조사를 넘어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기능까지 갖추는 ‘푸드테인먼트’ 전략이다.
번트의 미국 6개 도시 탐방은 매운맛을 하나의 획일적인 기준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내슈빌의 핫치킨, 멕시코계 칠리 문화, 아시아계 소스와 한국식 불닭 등 지역마다 매운맛의 재료와 조리법, 즐기는 방식은 다르다. 글로벌 브랜드가 현지 문화를 단순히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차이를 존중해 콘텐츠에 담는다면 불닭은 ‘한국의 매운 라면’에서 ‘세계의 매운맛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영역을 넓힐 수 있다.
다만 매운맛 콘텐츠가 자극적인 경쟁으로만 흐를 가능성은 경계해야 한다. 극단적인 매운맛 섭취를 반복적으로 부추기면 어린이·청소년의 무리한 모방이나 건강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소셜미디어의 매운맛 도전과 고함량 캡사이신 제품의 안전성을 둘러싼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콘텐츠에는 섭취량과 주의사항을 명확히 알리고, ‘참는 능력’보다 맛과 문화, 사람의 이야기에 무게를 두는 책임 있는 연출이 필요하다.
결국 매운맛 산업의 다음 승부처는 어느 제품이 가장 매운가가 아니라 누가 매운맛을 가장 풍부한 경험으로 설계하느냐에 있다. 단계별 강도와 다양한 풍미, 현지 음식문화에 대한 존중, 안전한 참여 방식까지 갖춰야 일시적인 챌린지를 지속 가능한 문화로 바꿀 수 있다.
삼양라운드스퀘어의 번트 확대는 식품기업이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취향과 놀이, 관계를 만드는 콘텐츠 기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닭이 세계인의 혀를 사로잡았다면, 이제 번트는 매운맛을 둘러싼 이야기와 팬덤까지 선점하려는 도전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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