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 공연장 되고, 창작자는 시장으로…기업 메세나 ‘공간·육성’으로 진화
- 롯데월드타워 무료 클래식에 시민 4500명…상업공간을 문화 플랫폼으로
- 삼성·LG·현대백화점은 미술관·공연장 운영, CJ·KT&G는 신진 창작자 육성
- 지난해 기업 문화예술 지원액 7.4% 감소…일회성 행사 넘어 지속 가능한 투자 필요
기업들의 문화예술 지원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공연이나 전시 제작비를 후원하는 전통적인 메세나 활동을 넘어 기업이 보유한 공간을 시민에게 개방하고, 신진 예술가를 발굴해 작품 제작과 유통까지 지원하는 방향으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롯데가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앞 광장에서 개최한 무료 클래식 공연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최근 사례다. 기업의 상업시설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 시민이 문화를 경험하고 도시의 시간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롯데는 지난 23일 롯데월드타워 월드파크에서 ‘2026 롯데 서머 클래식 콘서트’를 개최했다. ‘롯데가 초대하는 한여름 밤의 도심 속 클래식’을 주제로 열린 공연에는 시민 약 4500명이 참석했다.
지휘자 정한결과 디토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았으며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 테너 존 노,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 등이 무대에 올랐다. 정통 클래식뿐 아니라 영화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을 함께 구성해 클래식 공연에 익숙하지 않은 시민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번 공연은 롯데월드타워를 기업의 랜드마크에서 시민이 이용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제안에서 출발했다. 롯데는 서머 클래식 콘서트를 여름철 정례 문화행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롯데월드타워 일대에서는 이미 계절별 문화·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다. 봄에는 벚꽃을 활용한 ‘스프링 인 잠실’, 겨울에는 빛을 주제로 한 ‘롯데 루미나리에’를 운영한다. 수직 마라톤 ‘스카이런’과 아쿠아슬론 등 스포츠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공간을 시민에게 개방하는 문화 전략은 기업에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문화행사는 방문객이 상업시설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고, 기업과 지역사회가 접촉하는 계기를 넓힌다. 기업의 사회공헌과 도시 관광, 브랜드 경험이 하나의 공간에서 연결되는 구조다.
롯데월드타워와 롯데월드몰은 올해 2월 누적 방문객 5억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연간 방문객은 외국인 방문객 증가에 힘입어 역대 최대인 6000만명을 돌파했다. 문화 프로그램이 직접적인 방문객 증가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지만, 랜드마크의 경쟁력이 건물 규모나 입점 매장뿐 아니라 그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내 기업의 문화지원은 크게 공간 조성, 시민의 문화 접근성 확대, 창작자 육성이라는 세 가지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LG연암문화재단이 운영하는 LG아트센터 서울은 기업이 장기간 공연 인프라를 운영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2000년 서울 역삼동에서 문을 연 뒤 2022년 마곡으로 이전한 LG아트센터는 1335석 규모의 ‘LG 시그니처 홀’과 공연 형태에 따라 공간을 바꿀 수 있는 ‘U+ 스테이지’를 갖추고 있다.
LG는 공연장 운영 목적을 문화예술의 창작과 교류를 통한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단발성 공연 후원보다 공연장이 지속적으로 작품과 관객을 연결하도록 기반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LG아트센터는 2023년 말까지 누적 7360회의 공연을 개최하고 480만명의 관객을 맞았다.
삼성문화재단은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을 중심으로 전통미술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복합문화공간 ‘사운즈 S’에서는 클래식과 전통공연 등으로 지원 영역을 넓히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은 이러한 장기적인 문화예술 공헌을 인정받아 2025년 메세나대상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현대백화점은 백화점과 쇼핑몰 안에 전시와 공연, 교육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문화 접근성을 확대하고 있다. 알트원 뮤지엄과 갤러리 H, 현대어린이책미술관, 문화홀 등을 운영하며 고객이 일상적인 소비 공간에서 미술과 공연을 접하도록 한다. 한국메세나협회의 2025년 조사에서는 개별 기업 가운데 문화예술 지원 규모가 가장 큰 기업으로 집계됐다.
문화공간이 관객을 만드는 기반이라면 CJ문화재단과 KT&G 상상마당의 지원사업은 새로운 창작자를 성장시키는 데 무게를 둔다.
설립 20주년을 맞은 CJ문화재단은 대중음악 ‘튠업’, 창작뮤지컬 ‘스테이지업’, 영화 ‘스토리업’ 등을 통해 창작자의 작품 기획부터 제작, 공연, 유통과 해외 진출을 단계적으로 지원한다.
2026년 튠업 선정 뮤지션에게는 앨범 제작비와 공연장, 중·대형 공연 및 글로벌 투어 기회가 제공된다. 스토리업은 선정된 단편영화에 기획개발과 제작비, 후반 작업, 영화제 출품을 지원하고 최종 작품을 앤솔로지 영화로 묶어 극장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유통까지 추진한다.
이는 문화지원의 목표가 ‘작품을 만드는 것’에서 ‘창작자가 시장에 진입하는 것’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작 지원금만 지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문가 멘토링과 제작시설, 공연 무대, 홍보와 유통망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KT&G는 상상마당을 기반으로 음악과 영화, 사진, 디자인, 시각예술 분야의 신진 창작자를 지원하고 있다. 2007년 시작된 ‘밴드 디스커버리’는 올해 18회를 맞았으며 지금까지 54개 팀에 앨범 제작과 공연 기회를 제공했다.
2008년 시작된 한국사진가 지원 프로그램 ‘SKOPF’는 2026년까지 신진 사진가 57명을 배출했다. 이 밖에도 대학생 뮤지션을 위한 ‘청춘비상’, 신진 디자이너의 브랜드 출시를 돕는 ‘디자인 챌린지’, 단편영화 발굴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지원 분야를 세분화하고 있다.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이 확대되는 이유는 사회공헌의 효과가 일방적인 기부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장과 미술관은 시민에게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창작자 지원은 새로운 작품과 일자리, 콘텐츠 산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기업은 사회적 기여와 함께 브랜드의 철학을 구체적인 경험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 메세나가 안정적인 성장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메세나협회 조사에 따르면 2025년 국내 기업과 기업 출연 재단의 문화예술 지원액은 1968억7900만원으로 전년보다 7.4% 감소했다. 2022년부터 이어지던 증가세가 3년 만에 꺾이며 다시 2000억원 아래로 내려갔다.
같은 기간 문화예술 지원에 참여한 기업은 728개사로 24% 증가했고 지원 건수도 2392건으로 28.5% 늘었다. 더 많은 기업이 문화지원에 참여했지만 전체 지원액은 줄었다는 것은 지원의 외연은 넓어졌으나 개별 사업에 투입되는 자원은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기업의 문화지원이 브랜드 홍보를 위한 일회성 행사에 머물지 않으려면 지속성과 예술적 독립성이 필요하다. 방문객 수와 미디어 노출만으로 성과를 평가하면 대중성이 높은 장르와 유명 예술가에게 지원이 집중되고, 실험예술이나 지역 문화, 신진 창작자는 다시 소외될 수 있다.
공연 관객과 시설 방문객뿐 아니라 지원받은 예술가의 활동 지속률, 후속 작품 제작, 시장 진출, 지역 주민의 문화 접근성 변화 등을 장기적으로 측정할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의 성과는 단기간의 매출이나 관객 수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롯데월드타워의 여름밤을 채운 무료 클래식은 기업이 가진 공간을 시민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출발이다. 여기에 창작자 육성과 작품 제작, 지역 문화생태계 지원이 연결된다면 기업 문화지원은 행사를 넘어 지속 가능한 사회적 자산으로 발전할 수 있다.
기업이 문화예술을 돕는다는 것은 단순히 공연 한 편의 비용을 부담하는 일이 아니다. 시민에게는 새로운 문화 경험을, 창작자에게는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를, 도시에는 사람들이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을 제공하는 일이다. 기업 메세나의 진정한 가치는 얼마를 지원했는지보다 문화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얼마나 오래 남겼는지에 따라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더 좋은 미래를 위한 콘텐츠 플랫폼 – <굿퓨처데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