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가 바꾼 ‘쇳물에서 자동차까지’…현대제철·포스코, 미국서 8조원 승부
- 루이지애나에 연산 270만t 전기로 제철소 착공…2029년 상업생산 목표
- 현대제철·포스코·현대차·기아 공동 투자…미국 내 철강·부품·완성차 공급망 완성
- DRI·전기로로 탄소 70% 감축 도전…현지화와 국내 산업기반 유지가 과제
현대제철과 포스코가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약 8조원을 투입하는 전기로 일관제철소 건설에 들어갔다. 국내에서는 자동차강판 시장을 놓고 경쟁해 온 양대 철강사가 미국에서는 생산시설과 기술, 판매망을 공유하며 관세 장벽과 저탄소 전환이라는 공동 과제에 대응한다.
현대제철과 포스코, 현대자동차, 기아가 참여한 합작법인 ‘현대제철-포스코 루이지애나 스틸(HPLS)’은 미국 루이지애나주 도널슨빌 리버플렉스 메가파크에서 제철소 기공식을 열고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 나섰다.
제철소는 약 737만㎡, 223만평 규모 부지에 들어선다. 여의도 면적의 약 2.5배에 해당하는 땅으로, 얼마 전까지 사탕수수를 재배하던 지역이 북미 자동차·철강산업의 새로운 생산거점으로 바뀌게 된다.
총투자비는 58억달러로 약 8조원에 이른다. 2028년 말 시운전을 거쳐 2029년 1분기 상업생산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다. 연간 생산능력은 270만t으로 자동차강판 180만t과 데이터센터·전력설비 등에 사용되는 일반 산업용 강재 90만t을 생산할 예정이다.
지분은 현대제철이 50%, 포스코가 20%, 현대차와 기아가 각각 15%씩 보유한다. 철강 생산기업뿐 아니라 실제 강판을 사용하는 완성차 업체가 직접 투자자로 참여해 초기 수요처까지 확보한 구조다.
루이지애나 제철소는 현대차그룹이 미국에서 추진해 온 현지 생산체계의 마지막 퍼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차그룹은 앨라배마 현대차 공장과 조지아 기아 공장,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미국 내 완성차 생산능력을 확대해 왔다.
배터리와 주요 부품업체도 미국 남부에 동반 진출했지만 자동차 차체의 핵심 소재인 강판은 상당 부분 한국에서 수입하거나 미국 철강업체로부터 공급받아야 했다. HPLS가 가동되면 미국에서 생산한 철강을 현지 부품·완성차 공장에 직접 공급하는 ‘철강에서 자동차까지’의 생산체계가 완성된다.
현대차그룹이 한국에서 구축했던 수직계열화 모델을 북미로 확장하는 셈이다. 원자재 조달부터 강판 생산, 부품 가공과 완성차 조립까지의 거리가 짧아지면서 물류비와 운송 기간을 줄이고 공급망 충격에도 보다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미국의 높은 철강 관세는 이번 투자를 촉진한 결정적인 배경이다.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철강 관세를 50%로 높이면서 한국에서 생산한 철강을 미국으로 수출해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반면 미국은 연간 철강 수요가 자국 생산량을 웃도는 대표적인 철강 순수입국이다. 자동차와 건설, 에너지,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로 고급 판재류 수요가 이어지는 데다 철강 내수가격도 아시아와 유럽보다 높은 수준에서 형성돼 있다.
현지 생산은 수입 관세를 피하기 위한 방어 전략이면서 세계 최대 고부가가치 철강시장에 직접 진입하기 위한 공격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HPLS가 생산하는 자동차강판을 현대차·기아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계 완성차 업체에 공급하면 현대제철과 포스코는 북미 고객 기반을 동시에 확대할 수 있다.
국내 철강업계 1·2위가 해외에서 공동 생산기지를 구축한다는 점도 주목된다. 현대제철은 대규모 투자 부담을 나누고 포스코는 별도의 제철소를 건설하지 않고도 미국 내 자동차강판 생산 기반을 확보하게 됐다.
포스코가 보유한 고급강 제조 기술과 글로벌 고객망, 현대제철의 자동차강판 생산 경험과 현대차그룹의 안정적인 수요를 결합하면 현지 철강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규모와 사업구조를 갖출 수 있다. 국내에서의 경쟁을 해외시장에서의 ‘팀 코리아’ 협력으로 전환한 사례다.
HPLS는 저탄소 철강 기술을 상용화하는 실증무대이기도 하다. 제철소에는 석탄을 사용하는 기존 고로 대신 직접환원철(DRI)과 전기로를 결합한 공정이 적용된다.
DRI는 철광석에 포함된 산소를 석탄이 아닌 천연가스로 제거해 만든 철 원료다. 이를 고철과 함께 전기로에서 녹이면 고로보다 탄소 배출을 크게 줄이면서 고급강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순도를 확보할 수 있다.
HPLS 측은 새로운 공정을 통해 기존 고로 방식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약 70%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DRI 생산에 사용하는 천연가스를 수소로 대체하고 전기로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해 탄소 배출을 추가로 낮춘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전기로에서 고급 자동차 외판재를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기술적 난도가 높은 과제다. 자동차 외판은 얇은 강판을 복잡한 형태로 가공하는 과정에서도 균열이 발생하지 않아야 하며 표면 품질과 강도, 성형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고철에 포함된 구리 등 불순물을 정밀하게 관리하고 DRI 혼합 비율과 전기로 조업조건을 최적화해야 고로에서 생산한 강판과 대등한 품질을 확보할 수 있다. HPLS의 진정한 경쟁력은 공장 규모보다 저탄소 공정으로 고급 자동차강판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양산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루이지애나는 저렴한 천연가스와 전력, 미시시피강의 수운, 항만과 철도망을 갖추고 있어 대규모 제철소 운영에 유리하다. 제철소 앞에 전용 항만을 건설하면 철광석 원료를 선박으로 들여오고 생산한 강판을 철도와 트럭으로 미국 남부 자동차 생산지역에 공급할 수 있다.
지역경제에는 1300여개의 직접 일자리와 약 4100개의 간접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대규모 제조업 투자를 유치하려는 미국 정부와 루이지애나주에도 HPLS는 공급망 강화와 지역 고용을 상징하는 프로젝트다.
다만 미국 현지 생산 확대가 국내 제조업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철강과 자동차, 배터리 기업이 관세와 보조금 조건을 따라 해외 생산을 확대하면 국내 설비투자와 협력업체 일자리, 산업 생태계가 상대적으로 위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투자를 단순한 국내 생산시설 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50% 관세로 한국산 철강의 미국 수출 경쟁력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현지 생산시설이 없으면 미국 시장 자체를 잃을 수 있다. HPLS는 국내에서 생산하던 물량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수출만으로 접근하기 어려워진 시장을 현지 생산으로 다시 확보하는 성격이 강하다.
중요한 것은 미국 투자와 국내 산업기반을 상호 보완적인 구조로 만드는 일이다. 범용 자동차강판은 수요처와 가까운 미국에서 생산하더라도 초고장력강과 전기차용 특수강, 수소환원제철 기술, 공정 제어 소프트웨어 등 핵심 연구개발과 고부가가치 생산은 국내에서 강화해야 한다.
루이지애나에서 축적한 DRI·전기로 조업 경험을 당진과 포항·광양 등 국내 제철소의 저탄소 전환에 활용하는 기술 환류 체계도 필요하다. 미국 공장이 독립적으로 성장하고 국내 공장은 노후화되는 구조가 아니라 해외 실증성과가 국내 설비혁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국내 중소 철강·설비 기업이 HPLS 공급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 현지 조달 요건을 충족하면서도 국내 기업이 보유한 제철 설비, 자동화, 로봇, 안전·환경 기술을 함께 수출한다면 대기업의 해외 투자를 산업 생태계 전체의 기회로 넓힐 수 있다.
환경 인허가와 지역사회 수용성은 사업 일정의 변수다. 전기로와 DRI를 적용하더라도 대규모 제철소는 상당한 전력과 용수, 천연가스를 사용하고 대기오염물질을 배출한다. 탄소 감축 효과뿐 아니라 실제 오염물질 관리와 주민 안전, 정보 공개 수준을 통해 지역사회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미국의 통상정책이 장기간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다. 관세를 피해 현지에 거액을 투자했더라도 정권과 정책 변화, 인건비 상승, 환경 규제, 에너지 가격 변동이 수익성을 흔들 수 있다. 안정적인 고객 확보와 원가 관리, 고급강 품질 조기 안정화가 동시에 요구된다.
루이지애나 제철소는 한국 제조업이 보호무역 시대에 선택한 새로운 생존 방식이다. 국내 기업이 수출만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주요 시장 안에 생산과 공급망을 구축하고 현지 기업과 정면으로 경쟁하는 구조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270만t의 철강을 생산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국의 철강 기술과 자동차 수요, 저탄소 공정을 결합해 미국 시장에서 새로운 제조 경쟁력을 창출하고 그 성과를 국내 산업 고도화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사탕수수밭에서 시작된 8조원 규모의 도전이 관세 회피를 위한 공장 건설에 머물지 않고 한국 철강·자동차산업의 글로벌 경쟁구도를 바꾸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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