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다시 태어난 ‘벚꽃동산’, 뉴욕 간다…한국 연극 세계화 새 무대
- 전도연·박해수 출연…9월 16~26일 파크 애비뉴 아모리서 11회 공연
- 체호프 고전을 21세기 서울 이야기로 재해석…한국어 공연·영어 자막 제공
- 홍콩·싱가포르·애들레이드 거친 국내외 투어, 뉴욕서 대미 장식
서울을 배경으로 새롭게 태어난 안톤 체호프의 연극 ‘벚꽃동산’이 세계 공연예술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 무대에 오른다.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공연하는 국내 제작 연극이 뉴욕의 주요 예술기관 공식 시즌에 초청되면서 K팝과 영화, 드라마에 이어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 진출 가능성을 보여줄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LG아트센터가 제작하고 세계적인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벚꽃동산’은 오는 16일부터 26일까지 미국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의 웨이드 톰슨 드릴 홀에서 북미 초연을 진행한다. 공연은 총 11회 열리며 현지 관객을 위해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이번 뉴욕 공연은 2024년 6월 서울 초연을 시작으로 부산과 홍콩, 싱가포르, 호주 애들레이드를 거쳐 이어진 2년여의 국내외 투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일정이다. 파크 애비뉴 아모리가 ‘벚꽃동산’을 2026년 시즌 공식 프로그램으로 초청했으며, 이 공연장에 한국 작품이 오르는 것은 처음이다.
파크 애비뉴 아모리는 뉴욕 맨해튼에 자리한 대표적인 공연예술 공간이다. 19세기 유럽 기차역을 연상시키는 약 5만5000제곱피트 규모의 웨이드 톰슨 드릴 홀을 중심으로 피나 바우쉬, 로버트 윌슨, 샘 멘데스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여 왔다.
이번 초청은 파크 애비뉴 아모리 관계자가 2024년 서울 초연을 직접 관람하면서 성사됐다. 당시 방한한 마이클 로너건 수석 프로듀서는 공연을 본 다음 날 LG아트센터 측에 2026년 가을 시즌 초청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벚꽃동산’은 체호프가 1904년 발표한 동명 희곡의 이야기 구조를 유지하면서 시대와 공간을 21세기 서울로 옮긴 작품이다. 혁명 이전 러시아에서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의 이야기를 급격한 경제·사회적 변화를 경험한 현대 한국 가족의 이야기로 변주했다.
전도연은 원작의 류보프 라네프스카야를 재해석한 송도영을 연기한다. 과거의 화려했던 삶과 가족의 상실, 변화하는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이다. 이번 작품은 전도연이 27년 만에 선택한 연극 복귀작이기도 하다.
박해수는 원작의 상인 예르몰라이 로파힌을 현대 한국의 신흥 사업가로 옮긴 황두식 역을 맡는다. 몰락하는 기존 가문과 새롭게 부상하는 계층 사이의 긴장감을 통해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과 과거에 머무르는 사람의 대비를 보여준다.
뉴욕 공연에는 전도연과 박해수를 비롯해 손상규, 최희서, 이지혜, 남윤호, 유병훈, 이세준, 이주원, 박희정 등 한국 배우 10명이 출연한다. 전도연과 박해수에게는 이번 작품이 뉴욕 연극 무대 데뷔작이다.
무대에는 건축가 사울 킴이 설계한 투명한 유리집이 등장한다. 내부와 외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드러내는 공간을 통해 사라져가는 가족과 재산, 기억의 경계를 시각화한다. 음악감독 장영규의 음악도 현대 서울로 옮겨온 작품의 정서와 배우들의 연기를 뒷받침한다.
‘벚꽃동산’은 서울 초연 당시 30회 공연에서 객석 점유율 95%를 기록하며 약 4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2025년 홍콩 아시아플러스 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오른 첫 해외 공연에서는 객석 점유율 99.9%를 기록했고, 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와 호주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에서도 만석에 가까운 호응을 얻었다.
이번 뉴욕 공연의 의미는 유명 배우의 해외 진출에만 머물지 않는다. 국내 공연장이 기획·제작한 작품이 세계적인 연출가와 한국 배우·창작진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고, 해외 주요 공연장의 정규 시즌 프로그램으로 유통되는 제작 구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러시아 고전을 서구적 방식으로 재현하는 대신 현대 서울의 이야기로 바꾸고 한국어로 공연한다는 점도 주목된다. 작품의 배경과 언어를 해외 관객에게 맞춰 지우기보다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경험을 유지하면서 변화와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벚꽃동산’의 뉴욕 공연이 호평을 얻는다면 국내 공연예술계에도 새로운 경로가 열릴 수 있다. 완성도 높은 한국 제작 연극이 국내 공연을 마친 뒤 해외 페스티벌과 극장의 시즌 프로그램을 순회하는 장기적인 유통 모델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유리집에서 출발한 ‘벚꽃동산’은 홍콩과 싱가포르, 애들레이드를 거쳐 뉴욕에 도착한다. 이번 공연은 한 작품의 투어를 마무리하는 무대인 동시에 한국 연극이 번역과 자막을 넘어 작품 자체의 힘으로 세계 관객과 만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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