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만들고 미국서 완성…SK하이닉스, HBM ‘한미 생산망’ 구축
- 인디애나 첨단 패키징 공장 착공…40억달러 이상 투자해 2029년 하반기 양산 목표
- 한국산 D램 웨이퍼를 미국서 적층·검증…현지 고객 대응과 공급망 안정성 강화
- 패키징·공동 연구개발로 경쟁 확대…국내 제조 기반과 협력사 동반 성장도 과제
인공지능(AI) 메모리 경쟁이 반도체 성능과 생산량을 넘어 ‘어디서 만들고 누구와 개발하느냐’의 경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미국 인디애나주에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거점을 착공하면서 한국의 D램 제조 역량과 미국의 AI 고객·연구개발 생태계를 연결하는 생산망 구축에 나섰다.
SK하이닉스는 27일(현지시간)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서 차세대 HBM 첨단 패키징 공장인 ‘인디애나 팹’ 기공식을 열었다. 총투자액은 40억달러 이상으로, 2028년 10월 클린룸을 완공하고 2029년 하반기부터 차세대 HBM을 양산할 계획이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는 현장에서 생산할 제품으로 HBM4E를 제시했다. 최종 생산능력은 웨이퍼 기준 연간 수십만장 규모를 목표로 한다.
이번 투자를 이해하는 핵심은 공장의 역할이다. 인디애나 팹은 D램 웨이퍼 제조부터 모든 공정을 미국에서 수행하는 시설이 아니다. 한국에서 생산한 첨단 D램 웨이퍼를 공급받아 칩을 쌓고 연결하는 패키징과 테스트를 거쳐 HBM으로 완성하는 후공정 거점이다.
‘메이드 인 USA’ HBM을 공급하되 그 바탕에는 한국의 전공정 생산 역량이 놓이는 구조다. 국내 생산을 통째로 옮기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으며, 한국과 미국의 공장이 긴밀하게 연결돼야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첨단 패키징을 단순 조립으로 볼 수는 없다. HBM은 여러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도록 만든 메모리다. 칩 사이의 연결 품질과 적층 정밀도, 열 관리, 수율이 완제품의 성능과 원가에 영향을 미친다. 같은 수준의 D램을 확보하더라도 이를 안정적으로 쌓고 검증하는 능력에 따라 경쟁력이 달라질 수 있다.
인디애나 투자는 이러한 후공정 역량을 미국 AI 산업의 수요와 연결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고객과 현지에서 기술 협력을 확대하면 차세대 제품의 요구사항을 반영하고, 시제품 검증이나 품질 문제에 대응하는 접점을 넓힐 수 있다.
공장에는 생산라인과 함께 첨단 패키징 연구개발 테스트베드도 들어선다. 고객사와 대학, 협력사가 차세대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시제품 제작과 성능 검증을 진행하는 공간이다. SK하이닉스는 기공식에서 퍼듀대학교와 첨단 패키징 및 시스템 통합 분야의 연구개발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이는 메모리 기업의 역할이 완성된 부품을 공급하는 데서 고객의 AI 시스템을 함께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넓어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처리 속도뿐 아니라 전력 소비와 발열, 시스템 구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AI 반도체에서는 개발 초기부터 협력하는 관계가 중요해질 수 있다.
미국 내 생산 기반 확보는 공급망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미국 고객에게는 HBM을 현지에서 완성하고 검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기고, SK하이닉스에는 미국 반도체 생태계에 장기적으로 참여할 기반이 마련된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지원법에 따라 이 사업에 최대 4억5800만달러의 직접 지원금과 최대 5억달러의 대출을 제공하기로 확정했다. 다만 지원금은 건설과 기술·생산 등 약정된 단계의 달성 여부에 따라 지급되는 구조로, 투자 발표와 동시에 전액 확보되는 자금은 아니다.
국내 산업에 돌아올 효과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공장이 한국산 웨이퍼를 사용하는 만큼 국내 제조 기반과 연결된 수요를 만들 수 있다.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현지 공급망에 참여한다면 해외 고객과 거래 경험을 넓히는 기회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국내 협력사의 실제 참여 규모와 기술 고도화, 한국 내 연구개발·생산 투자와의 연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해외 거점 확대가 국내 생태계의 성장으로 이어지는지를 구체적인 투자와 수주 실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 팹이 본격 가동되면 약 1000명의 인력이 근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건설과 운영, 협력업체 등을 포함한 직·간접 고용 효과는 약 7000명으로 제시했다. 이는 회사의 예상치로, 공장 상주 인력과 전체 파급 고용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사업의 성패는 착공 이후에 결정된다. 계획대로 시설을 완공하는 것뿐 아니라 숙련 인력을 확보하고, 차세대 제품의 수율과 고객 인증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에 걸친 물류와 생산 일정도 정교하게 맞춰야 한다.
2029년 양산을 목표로 하는 만큼 현재의 AI 투자 열기를 미래 수요와 동일하게 볼 수도 없다. 고객사의 설비투자 속도와 제품 전환 일정에 맞춰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신규 공장의 비용을 감당할 가동률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디애나 팹은 한국 메모리 기술이 미국 AI 공급망에서 역할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앞으로의 경쟁은 HBM을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의 제조 경쟁력과 미국의 고객·연구개발 기반을 연결해 원하는 성능의 제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그 성과를 국내 산업의 성장으로 이어가는 능력이 함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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