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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전쟁의 새 축 SMR…한국, ‘원자로 파운드리’ 넘어 글로벌 사업자로

  • 데이터센터 전력소비 2030년 950TWh 전망…24시간 무탄소 전원 확보 경쟁
  • 미국·캐나다·영국·중국 상용화 속도…K제조·EPC 기업 글로벌 공급망 핵심 부상
  • 경제성·핵연료·규제 넘어 독자 노형 실증과 사업개발 역량 확보가 과제

인공지능(AI) 산업의 경쟁력이 반도체와 데이터에 이어 ‘전력 확보 능력’으로 확장되고 있다. 생성형 AI 학습과 추론을 담당하는 대형 데이터센터는 24시간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전력망 확충 속도가 데이터센터 건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소형모듈원자로(SMR)가 AI 시대의 핵심 에너지 인프라로 부상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소비량이 2025년 약 485TWh에서 2030년 약 950TWh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AI에 특화된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는 같은 기간 세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데이터센터가 한 국가의 전력 수요와 맞먹는 규모로 커지면서 빅테크 기업들은 전력 구매자가 아니라 발전사업의 투자자이자 장기 수요자로 전면에 나서고 있다.

SMR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원자로의 크기가 작기 때문만은 아니다. 출력 수십∼수백MW급 모듈을 공장에서 표준화해 제작하고 현장에서 조립하면 대형 원전보다 초기 투자 부담과 공사 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SMR의 기본 구상이다. 전력 수요 증가에 맞춰 모듈을 단계적으로 추가할 수 있고, 노후 석탄발전소 부지와 기존 송전망을 활용하거나 산업단지·데이터센터 인근에 배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태양광과 풍력의 출력 변동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원자로는 안정적으로 열을 생산하고 에너지저장장치나 열저장설비를 이용해 수요가 높은 시간에 발전량을 늘리는 방식이다.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자로는 345MW급 소듐냉각고속로와 용융염 열저장시스템을 결합해 기저전원과 출력조절 전원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도록 설계됐다.

다만 SMR이 당장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에너지부도 첨단원자로의 광범위한 보급 시점을 2030년대로 보고 있다. 신규 원자로는 인허가와 건설, 연료 확보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기존 원전과 재생에너지, 전력망, 에너지저장장치, 가스발전 등을 조합해야 한다. SMR은 단기 처방이라기보다 AI 산업의 중장기 전력 기반에 가깝다.

세계 SMR 경쟁은 설계 개념을 발표하는 단계를 넘어 건설허가와 공급망 확보, 첫 호기 제작으로 이동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80개가 넘는 SMR 설계와 개념이 개발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 개발·인허가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실제 상업운전 실적을 가진 사례는 러시아의 해상 부유식 원전과 중국의 고온가스로 HTR-PM 등으로 제한적이다. ‘80여개 노형’이 곧 ‘80여개 상용사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는 테라파워의 와이오밍주 케머러 나트륨 원자로가 지난 3월 원자력규제위원회로부터 비경수형 첨단원자로로는 처음 상업용 건설허가를 받았다. 테라파워는 4월 원자로 구조물 공사에 착수했으며 2030년대 초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메타와는 2035년까지 최대 8기의 나트륨 원자로를 개발하는 협력에 합의했다. 실현될 경우 빅테크의 장기 전력 수요가 SMR의 연속 발주를 뒷받침하는 대표 사례가 될 전망이다.

엑스에너지는 아마존의 투자를 바탕으로 워싱턴주에서 고온가스로 Xe-100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초기 320MW에서 최대 960MW까지 확대하는 구상이다. 화학기업 다우와는 전력뿐 아니라 산업용 공정열까지 공급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SMR 시장이 데이터센터용 전력에 그치지 않고 수소·석유화학·지역난방·해수담수화 등 열에너지 시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캐나다는 온타리오주 달링턴 원전 부지에 GE버노바히타치의 300MW급 BWRX-300을 건설하고 있다. 첫 호기는 2030년 말 가동을 목표로 하며, 향후 4기로 확대하면 총 1.2GW 규모가 된다. 영국은 롤스로이스SMR을 우선협상 사업자로 선정하고 2026년 4월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영국 정부는 설계·인허가와 부지 개발을 거쳐 2030년대 중반 전력망 연결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2023년 산둥성에서 모듈형 고온가스로 HTR-PM의 상업운전을 시작했고, 하이난에서는 125MW급 육상형 일체형 경수로 ACP100을 건설하고 있다. 러시아도 2020년부터 두 기의 35MW급 원자로를 탑재한 부유식 원전을 상업운전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민간 투자와 규제 개혁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중국과 러시아는 국가 주도 방식으로 실적을 먼저 축적하는 구도다.

이 같은 경쟁에서 한국의 역할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SMR은 설계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원자로 용기와 내부 구조물, 증기발생기 등 원전급 핵심 기자재를 정밀하게 반복 생산하고, 모듈을 대형 구조물로 조립한 뒤 정해진 일정과 예산에 맞춰 시공해야 한다. 한국은 원전 주기기 제작과 조선·해양플랜트의 대형 모듈 생산, 해외 원전 설계·조달·시공 경험을 함께 보유한 드문 국가다.

두산에너빌리티는 테라파워 케머러 1호기의 원자로 보호용기와 내부 구조물 등 핵심 기자재 제작 계약을 확보했다. 엑스에너지, 뉴스케일, 롤스로이스SMR 등 복수 개발사의 공급망에도 참여하면서 서로 다른 설계를 실제 원자로로 구현하는 ‘SMR 파운드리’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케머러 1호기의 원자로 용기 제작을 맡은 데 이어 후속 원자로격납시스템 구성품의 우선 제조사로 선정됐다. 대형 선박과 해양플랜트를 블록 단위로 제작해 온 조선업의 경험이 SMR 모듈 양산에 활용되는 사례다. 향후 연간 2∼3기 규모의 생산체제가 구축되면 한국 조선소가 글로벌 SMR 생산기지로 기능할 가능성도 커진다.

건설사들의 역할도 기자재 공급을 넘어선다. 현대건설은 테라파워와 최대 8기의 후속 나트륨 원자로에 대한 설계·조달·시공 협력 기본계약을 맺었고, 삼성물산은 뉴스케일의 루마니아 사업과 GE버노바히타치의 BWRX-300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다만 기본계약과 전략적 협력은 확정 수주나 최종투자 결정과 구분해야 한다. 실제 매출과 수익은 개별 사업의 인허가, 금융조달, 전력구매계약과 착공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SK는 2022년 테라파워에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한 데 이어 미국 실증사업과 후속 프로젝트, 국내 적용을 검토하는 ‘K-나트륨’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LNG 발전과 에너지저장장치로 초기 전력 수요에 대응하고 중장기적으로 SMR을 연결한다는 통합 에너지 플랫폼이다. SK하이닉스의 AI 반도체, SK텔레콤의 데이터센터, SK이노베이션의 전력·SMR, SK온의 배터리를 결합하면 반도체부터 전력 공급까지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국내 부지와 투자 규모, 전력 판매 방식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검토 단계다.

한국은 독자 노형에서도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개발한 110MW급 SMART100은 2024년 국내 표준설계인가를 받았다. 전력 생산과 해수담수화, 산업용 열 공급에 활용할 수 있는 일체형 경수로다. 170MW급 혁신형 SMR인 i-SMR은 2026년 2월 표준설계인가를 신청했으며 2028년 인가 획득과 2030년대 중반 첫 호기 가동을 목표로 한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누구의 SMR이 채택되더라도 참여할 수 있는 공급망’에 있다. 미국의 소듐냉각고속로와 고온가스로, 영국의 가압경수로, 캐나다의 비등경수로 등 노형이 달라도 원전급 소재와 단조품, 대형 용기, 모듈 제작, EPC 역량은 공통적으로 필요하다. 초기 시장에서 특정 설계의 승자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복수 개발사와 협력하는 한국 기업의 포트폴리오는 위험을 분산하면서 양산 경험을 선점할 수 있는 구조다.

그러나 제조 하청에 머문다면 시장이 커져도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은 원천설계와 연료, 장기 운영·정비, 금융을 보유한 해외 기업에 돌아갈 수 있다. 한국은 핵심 기자재 공급을 발판으로 공동설계, 프로젝트 개발, 사업 금융, 운영·정비까지 역할을 확장해야 한다. SMR 수출도 원자로 한 기를 판매하는 방식보다 전력구매계약과 산업단지 개발, 데이터센터, 수소·담수화 사업을 결합한 패키지형 사업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경제성은 가장 큰 변수다. SMR은 대형 원전보다 작기 때문에 한 기만 건설하면 규모의 경제에서 불리하다. 공장 제작과 짧은 공기라는 장점도 동일 설계를 반복 발주할 때 비로소 현실화된다. 첫 호기의 비용 초과와 일정 지연을 얼마나 억제하고 후속 물량을 연속적으로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빅테크와 정부가 장기 전력구매계약, 정책금융, 건설 위험 분담을 제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핵연료 공급망도 풀어야 할 과제다. 나트륨과 Xe-100 등 일부 4세대 원자로는 일반 경수로보다 농축도가 높은 고순도저농축우라늄(HALEU)을 사용한다. 현재 서방권의 상업적 공급능력은 충분하지 않다. 반면 BWRX-300과 SMART100, i-SMR 같은 경수형 SMR은 기존 저농축우라늄 공급망을 활용할 수 있다. 노형별 연료 조건이 다른 만큼 한국도 핵연료 조달과 가공, 장기 비축 전략을 세분화해야 한다.

규제의 국제적 정합성도 중요하다. 한 국가에서 안전성을 인정받은 설계가 수출 대상국마다 처음부터 심사를 반복하면 표준화와 양산 효과가 약해진다. 특히 소듐냉각로와 고온가스로는 기존 경수로와 다른 안전기준이 필요하다. 주요국 규제기관 간 공동심사와 설계인증 상호 활용, 국제 안전기준 마련에 한국이 적극 참여해야 한다.

안전과 주민 수용성은 속도 경쟁에 밀려서는 안 된다. ‘소형’이라는 표현이 위험과 방사성폐기물이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사용후핵연료 관리, 비상계획, 해체 비용, 사이버·물리적 보안, 냉각과 폐열 처리 대책을 노형별로 검증해야 한다. 데이터센터와 산업단지 인근에 설치하려면 전력 혜택과 위험 부담이 지역사회에 어떻게 배분되는지도 투명하게 논의해야 한다.

국내에서 검증된 첫 사업을 확보하는 일도 시급하다. 해외 개발사의 공급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독자 노형의 수출 실적을 만들기 어렵다. i-SMR 표준설계인가를 안전 원칙에 따라 차질 없이 진행하는 동시에 실증 부지와 사업주체, 전력구매자, 금융조달 방식을 조기에 구체화해야 한다. 국내 첫 호기의 건설비와 공기, 이용률을 입증해야 해외 발주처도 한국형 SMR을 선택할 수 있다.

AI 시대의 SMR 경쟁은 누가 가장 많은 설계도를 보유했느냐보다 누가 안전한 원자로를 정해진 가격과 일정에 반복 생산하느냐의 싸움이다. 한국은 원전 제작과 조선, 건설, 운영 능력을 연결해 이 경쟁의 중심 공급망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글로벌 SMR 공장’이라는 위상을 넘어 독자 기술과 사업개발, 금융, 운영 역량을 갖춘 종합 사업자로 도약하는 일이다.

SMR이 모든 전력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열쇠는 아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와 전력망, 저장장치, 기존 원전을 보완하며 AI 산업에 안정적인 무탄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유력한 선택지다. 정부와 기업이 상용화의 불확실성을 냉정하게 관리하면서도 첫 시장의 공급망과 운영 경험을 선점한다면 한국은 AI 전력전쟁과 글로벌 원전 산업 재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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