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빌 게이츠 재회…HD현대, 美 SMR 시장 공략 속도
- HD현대·테라파워·현대건설, 차세대 나트륨 원자로 상용화 협력 구체화
- HD현대, 원자로 용기 연 2~3기 생산체계 구축 목표로 선제 투자
- AI 데이터센터 전력수요·노후 원전 교체 맞물린 미국 시장 정조준
정기선 HD현대 회장이 빌 게이츠 테라파워 창업자 겸 회장과 다시 만나 미국 소형모듈원자로(SMR) 시장 공략을 위한 협력에 속도를 냈다. 테라파워의 원자로 기술과 HD현대의 제조 역량, 현대건설의 설계·조달·시공(EPC) 능력을 결합해 차세대 원자로 상용화를 앞당기겠다는 전략이다.
HD현대는 정기선 회장과 빌 게이츠 회장,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최고경영자, 이한우 현대건설 대표가 14일 서울에서 만나 차세대 원자로 상용화를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정 회장과 게이츠 회장의 만남은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 이후 약 7개월 만이다. 특히 지난 5월 HD현대와 테라파워, 현대건설이 ‘차세대 나트륨 원자로 사업 협력을 위한 3자 업무협약’을 체결한 이후 3사 최고경영진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사는 그동안 진행된 협력 상황을 점검하고 육상용 차세대 원자로의 상용화를 위한 기술·제조·건설 분야 협력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협력의 중심에는 테라파워가 개발 중인 소듐냉각고속로 기반 차세대 SMR ‘나트륨(Natrium) 원자로’가 있다.
기존 원자로가 주로 물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것과 달리 나트륨 원자로는 액체 상태의 소듐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테라파워는 원자로 기술을 제공하고 HD현대는 원자로 용기를 비롯한 핵심 주기기 제작을, 현대건설은 EPC를 담당하는 역할 분담 체계를 구축했다.
정기선 회장은 “기술, 제조, EPC를 아우르는 협력체계를 기반으로 차세대 원자로의 상용화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자체 기술 개발과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SMR 발전 수요 증가에 적극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HD현대는 SMR 시장 확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생산설비 투자도 본격화한다.
회사는 향후 원자로 용기를 연간 2~3기 공급할 수 있는 생산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설비 투자를 추진할 계획이다. 원자로 시장이 본격적인 양산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안정적인 공급 역량을 확보해 글로벌 SMR 공급망에서 핵심 제조사로 자리 잡겠다는 전략이다.
HD현대와 테라파워의 협력은 이미 수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HD현대는 2022년 테라파워에 투자하며 전략적 관계를 시작했고, 2024년 12월에는 나트륨 원자로에 사용되는 원통형 원자로 용기를 수주해 제작에 착수했다.
이어 2025년 3월에는 테라파워와 나트륨 원자로 상업화를 위한 제조 공급망 확대 전략적 협약을 체결하고 약 1년간 제조 타당성과 가격 경쟁력, 납기 일정 등을 공동으로 검토했다.
이 같은 협력 성과를 바탕으로 HD현대는 올해 5월 테라파워 나트륨 원자로 주기기 핵심 설비의 제작·공급을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현대건설이 참여하면서 협력 구조도 더욱 강화됐다. 원자로 개발과 핵심 기자재 제작뿐 아니라 실제 발전소 건설까지 하나의 협력체계 안에서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협력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빠르게 커지고 있는 미국 원전 시장이 있다.
미국은 약 95GW 규모의 원전 설비를 운영하며 세계 원자력 발전 시장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시장 가운데 하나다. 상당수 원전이 1970년대부터 운영돼 향후 노후 발전소 교체와 수명 연장, 신규 원전 건설 수요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생성형 AI 확산으로 대형 데이터센터 건설이 급증하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이 다시 중요한 산업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만큼 태양광과 풍력 등 변동성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원자력을 포함한 안정적인 기저전원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기존 대형 원전보다 건설기간과 초기 투자 부담을 낮출 수 있는 SMR이 차세대 전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SMR 시장에서는 단순히 원자로 기술을 보유하는 것뿐 아니라 실제 설비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제조 공급망 구축이 중요하다. 여러 기의 원자로를 표준화해 반복 생산해야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형 구조물·조선 제조 역량을 축적한 HD현대가 원자로 용기와 핵심 설비 생산에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HD현대 입장에서는 조선업에서 쌓은 대형 후판 가공과 용접, 정밀 제작, 품질관리 역량을 원전 기자재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다. 테라파워 입장에서는 상용화 단계에서 필요한 안정적인 대규모 제조 파트너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향후 나트륨 원자로의 미국 내 상용화가 본격화되고 HD현대가 연간 2~3기의 주기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된다면, 이번 협력은 국내 기업이 글로벌 SMR 공급망에서 제조·건설 분야의 핵심 역할을 차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차세대 원자로 사업은 기술 검증과 규제기관 승인, 건설비 관리, 실제 발전 경제성 확보 등 넘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특히 새로운 원자로 유형은 상업 운전 단계까지 장기간의 검증과 인허가 절차가 필요해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되는지가 중요하다.
그럼에도 HD현대와 테라파워, 현대건설이 기술부터 기자재 제작, EPC까지 이어지는 협력 구조를 구축했다는 점은 향후 글로벌 SMR 경쟁에서 의미 있는 기반으로 평가된다.
AI 시대의 전력 수요 확대와 원전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이번 정기선 회장과 빌 게이츠 회장의 회동이 한국 제조업과 미국 차세대 원전 기술을 연결하는 새로운 원전 협력 모델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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