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선진국’의 마지막 숙제, 노벨상을 향한 도전
- 세계 최강 R&D 강국이 ‘최초의 발견’에 이르는 길
2025년 현재, 한국은 GDP 세계 10위권, GDP 대비 R&D 투자 비율 세계 1위(약 5.2%)를 자랑하는 과학기술 강국이다.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바이오헬스 등 응용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로 우뚝 섰고, 논문 수와 특허 수에서도 상위권을 달린다.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2000년 평화상)에 이어 노벨상 수상국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현실 앞에서 그 자부심은 잠시 멈춘다. 노벨 과학상(물리학·화학·생리의학) 분야에서는 여전히 ‘0’명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시간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일본은 1949년 첫 과학상 수상 이후 지금까지 28명을 배출했다. 인구 900만 명의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화학과 경제학 분야에서만 10명 이상을 냈다. 인구 870만 명의 스위스는 국민 1인당 노벨 과학상 수상자 비율로 세계 1위다. 한국의 R&D 규모는 이들 국가를 압도하면서도 왜 ‘혁신의 정점’인 노벨급 발견에는 이르지 못할까.
그 원인을 냉정히 들여다보고 해법을 모색할 시점이다.
기초과학의 위기: ‘빠른 성과’의 덫
한국 R&D의 80% 이상이 개발·응용 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기업 주도 R&D가 전체의 75~80%를 차지하며, 삼성·LG·SK 같은 대기업들은 상용화 가능한 기술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 이는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노벨 과학상을 멀어지게 했다.
노벨 과학상 수상 연구를 분석하면 그 차이가 명확하다. 최근 20년 노벨 과학상의 70% 이상이 기초연구 단계에서 시작되었으며, 발견부터 수상까지 평균 20~30년이 소요되었다. 이는 기초연구가 장기간에 걸쳐 축적되고 검증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에 비해 한국은 전체 R&D 투자 중 기초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15~20%에 불과하다. 정부 출연연구소와 대학의 기초연구 예산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배분 과정에서 ‘국가 전략기술’ 중심의 정책적 우선순위에 밀려난다. 결국 기초과학 연구자들은 장기적 탐구보다는 단기 성과를 요구받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결국 한국의 연구자들은 “왜 이 연구를 해야 하는가”라는 무거운 사회적 압박 속에서 위험한 도전을 피하게 된다.
반대의 사례를 보자. 이스라엘은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이 5% 수준으로 한국과 비슷하지만, 기초과학 비중이 40%를 넘는다. 군 복무를 마친 청년들에게 창의적 연구를 장려하는 문화도 강하다. 그 결과 노벨상에서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성과주의의 그늘: 창의성을 죽이는 평가 시스템
한국의 연구평가 체계는 논문 수(특히 임팩트 팩터가 높은 저널), 연구비 수주액, 기술이전 실적에 의존한다. 교수 승진과 연구비 배분이 3~5년 단위의 정량 지표에 매여 있는 탓에, 연구자들은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안전한’ 단기 프로젝트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실패율 90%가 넘는 고위험·고보상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는 노벨상의 현실과 정반대다. 노벨상 수상자 70% 이상은 10년 이상을 한 주제에 파고들었고, 평균 수상 연령은 60대 중반이다. 그들의 성공은 수십 년의 인내와 무수한 실패, 그리고 그 실패를 용인하는 제도적 환경의 산물이다.
스위스의 경우 연구자에게 평생 안정성을 보장하고, 실패를 ‘학습’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강하다. CERN 같은 대형 기초연구 시설도 국가가 장기적으로 지원한다. 한국의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좋은 시도였지만, 예산 불안정성과 외부 평가 압박으로 인해 ‘노벨 프로젝트’가 아닌 ‘성과 프로젝트’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재의 해외 유출: 국내 연구 환경의 국제 경쟁력 부족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연구자의 60% 이상이 매년 해외로 떠난다. 미국과 유럽의 연구소가 단순한 연봉 이상의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연구 자율성, 행정 부담의 최소화, 장기 프로젝트에 대한 안정적 지원 같은 환경들이다.
국내 대학 교수들의 현실은 다르다. 연구 시간의 50% 이상을 행정·강의·학생 지도에 쓴다. 해외에서 경력을 쌓다 귀국한 과학자들도 “한국은 연구하기 좋은 곳이 아니다”라고 토로하곤 한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외국인 연구자 비율 40% 이상을 목표로 제시했고, 세제 혜택과 영주권 제공으로 세계 인재를 끌어들였다. 이스라엘은 ‘탈피오트’ 프로그램처럼 군 복무 중 과학 영재를 선발해 평생 연구를 지원하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 한국의 인재 유출이 과거보다 줄었다고는 하나, 최고 인재들의 ‘장기 정착’을 유인하는 환경은 여전히 부족하다.
국제 연구 생태계에서의 주도권 부재
국제 공동논문 발표 비율만 보면 한국 연구자들의 글로벌 참여도가 높아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한국 연구자들은 ‘협력자’의 위치에 머문다. 프로젝트 리더십, 핵심 데이터 소유, 아이디어 주도권은 선진국이 쥐고 있다는 뜻이다.
대형 국제 프로젝트에서 이 현상은 두드러진다. LHC(대형강입자충돌기)나 인간게놈 프로젝트 같은 경우, 한국은 자금과 인력을 제공하지만 ‘주도’하지는 못한다.
비교 대상들은 이렇다. 스위스는 인구 대비 노벨상 수상 비율이 세계 최고지만, 그것은 유럽 전체 연구 네트워크(CERN, EMBL)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RIKEN 같은 독립적 대형 연구소를 통해 국제 무대에서 주도권을 확보했다. 한국은 아직 ‘글로벌 연구 허브’가 아닌 ‘우수한 협력 파트너’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교육 시스템의 한계: 창의성을 누르는 문화
한국의 초중고·대학 교육은 암기와 경쟁 중심이다. PISA(국제 학생평가) 점수는 세계 최고지만,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은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이 교육 환경에서 성장한 연구자들도 기존 이론 검증에는 익숙하지만, 패러다임을 뒤집는 가설 제시에는 여전히 조심스러워한다.
노벨상의 성격을 보면 이 문제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노벨상 수상 연구의 80%는 ‘예상치 못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스위스와 이스라엘은 초등부터 탐구와 토론 중심의 교육을 강조하고, 실패를 격려하는 교육 문화를 가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틀리면 안 된다”는 인식이 연구 현장까지 깊게 침투해 있다.
변화의 길: 장기·자율·다양성이 만드는 생태계
성공한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스라엘, 스위스, 싱가포르, 일본 등이 노벨급 연구를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하면 한 가지 철학이 돋보인다. 바로 ‘긴 호흡’과 ‘연구자 중심’이라는 마인드셋이다.
이스라엘은 기초과학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면서 군-학 연계 시스템을 구축했다. 스위스는 평생 안정성을 보장하고 국제 연구 허브로서의 위상을 강화했다. 싱가포르는 전략적 인재 유치 패키지를 통해 세계 최고 과학자들을 끌어모았고, 일본은 대형 독립 연구소에 장기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도 이들 모델을 벤치마킹해 근본적인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섯 가지 핵심 정책이 필요하다.
먼저, 기초과학 전용 엔도우먼트로 50조 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 정치권의 변동과 무관하게 30년 이상 안정적으로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단기 정치 논리에 좌우되지 않는 ‘과학의 영원한 파트너’를 만드는 의미다.
두 번째는 연구평가 시스템의 근본 혁신이다. 현재의 정량 중심 평가에서 벗어나 정량 지표 40%, 독창성·위험성·장기 영향을 평가하는 정성 지표 60%으로 구성을 바꾼다. 여기에 외부 국제 패널 심사를 도입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한다.
세 번째는 연구자들의 생활 안정화다. 교수들의 행정 부담을 현재의 절반으로 줄이고, 순수 연구에 전념하는 교수 트랙을 신설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실패한 연구도 경력으로 인정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연구자들이 도전적인 주제에 두려움 없이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네 번째는 글로벌 인재 허브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다. 해외에서 박사를 취득한 한국인 과학자들의 귀환을 적극 유도하기 위해 10년 연구비 보장, 독립 랩 제공, 가족 정착 지원 패키지를 마련한다. 동시에 외국인 연구자 비율을 현재의 두 배 수준인 30%까지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연구의 다양성을 높이고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기초 교육의 개혁이 필요하다. 초중고부터 ‘탐구형’ 과학 교육을 의무화하고, 대학 학부생의 연구 참여를 대폭 확대한다.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키우는 교육 토양이 있을 때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2035년을 목표로 한 실행 로드맵
이 같은 변화를 실제로 이루어내기 위한 구체적 일정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2035년 첫 노벨 과학상 수상을 목표로 3단계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기초 체질을 개선하는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기초과학 엔도우먼트를 설립하고, 연구평가 제도 개편을 시범적으로 운영한다. 동시에 기초과학연구원의 예산을 2배 확대하며, 해외에 있는 우수 한국 과학자 500명을 지원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이 단계에서의 성공이 전체 로드맵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시기다.
두 번째 단계인 2030년부터 2035년까지는 국제 리더십을 확보하는 기간이다. 차세대 입자가속기, 뇌과학 맵핑, 양자컴퓨팅 등 대형 국제 프로젝트 5건을 한국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와 함께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가 만나는 학제간 융합 연구 클러스터 10개를 구축한다. 이 단계를 거치며 한국은 단순한 ‘참여국’에서 ‘주도국’으로 도약하게 될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2035년 이후 장기 성과를 반영하는 보상 체계를 정착시키고, 국내 연구 클러스터 간 경쟁과 협력의 문화를 안착시키는 기간이다. 이 시점 즈음이면 기초과학 투자의 첫 수확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직되지 않는 접근이 필수다. 매 3년마다 중간 평가를 실시해 정책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추가 투자는 연간 GDP의 0.5% 수준으로 충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는 한국 경제 규모로 볼 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다.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여정, 지금 시작해야 한다
노벨 과학상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단순히 명예의 문제가 아니다. 노벨 과학상 수상 연구들이 인류의 문제를 푸는 기초를 마련했다. 항생제, 레이저, 반도체, 유전자 편집 기술 등 우리가 누리는 현대 문명의 많은 것들이 노벨상 수상자들의 ‘예상치 못한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즉, 노벨 과학상은 인류 진보의 척도다.
또한 노벨 과학상은 국가의 과학적 성숙도를 상징한다.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인프라와 인재 풀을 갖추었다. GDP 대비 R&D 투자도 세계 최고다. 그럼에도 기초과학 분야에서 독창적 발견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과학의 구조적 취약점을 드러낸다. 이는 앞으로 한국 과학이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응용과학만으로는 국가 경쟁력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의 토양이 없으면 미래의 혁신은 없다.
더욱이 전 지구적 과제들, 즉 기후변화, 팬데믹, 에너지 위기, 신질병 등이 점점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기초과학의 역할은 더욱 절실해진다. 이러한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발견에 있다. 한국이 그런 발견을 주도할 수 있는 국가가 되지 못한다면, 미래에 인류의 난제 해결에 참여하는 ‘조력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한 세대를 관통하는 긴 호흡의 제도, 실패를 학습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성숙, 그리고 연구자를 사회의 자산으로 진심으로 존중하는 국가적 합의다. 정치권이 임기에 갇힌 4년짜리 가시적 성과 대신 20년 후를 내다보는 투자에 합의하고, 기업이 분기 실적을 넘어 기초과학 생태계 조성에 자발적으로 나서며, 시민사회가 노벨상 소식에만 환호하는 대신 무명의 연구자들을 일상적으로 응원할 때 비로소 변화는 시작된다.
과학 강국으로 가는 길은 예산 증액만으로는 열리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지금 당장’이 아닌 ‘언젠가 올 미래’를 위해 기꺼이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을, 그리고 실패한 연구도 다음 세대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날을 위해 지금 시작해야 한다. 2035년, 한 명의 한국 과학자가 스톡홀름의 무대에 서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닌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책임을 되새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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