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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첫 물결 일으킨 ‘대발이 아버지’, 국민배우 이순재 별세

  • 中 1억 5천만 명이 사랑한 ‘사랑이 뭐길래’ – 한류 원년의 주역
  • “연기에 완성은 없다” – 90세까지 불태운 배우혼
  • 60년 무대 위 삶, 한국 대중문화사에 새긴 뚜렷한 발자국

2025년 11월 25일 새벽, 대한민국 연예계의 거목이자 한류의 첫 물결을 일으킨 주역인 배우 이순재가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한 이후 한국 방송 역사를 함께 해온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역 배우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이순재의 이름 앞에는 늘 ‘한류의 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1997년 6월 15일, 중국 CC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는 평균 시청률 4.2%로 CCTV 수입 드라마 가운데 역대 2위를 기록하며 1억 5천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들였다. 이 작품에서 이순재가 연기한 ‘대발이 아버지’ 이병호는 가부장적이면서도 점차 변화하는 인물로, 중국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전통과 현대, 동양적 가치관과 새로운 세대의 충돌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이 드라마는 한류라는 거대한 물결의 출발점이 되었다.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대발이 아버지’로 열연한 배우 이순재
‘사랑이 뭐길래’ 출연 배우들과 포즈를 취한 배우 이순재

국내에서는 평균 시청률 59.6%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사랑이 뭐길래’의 성공 이후에도 이순재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방영된 KBS ‘목욕탕집 남자들’에서는 목욕탕 주인 할아버지 역으로 최고 시청률 53.4%를 기록하며 또 한 번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 역시 중국에서 늦은 밤 10시 50분에 방영되었음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두 작품을 통해 이순재는 단순한 배우를 넘어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린 문화 전도사가 되었다.

그의 배우로서의 철학은 명확했다. “연기를 아주 쉽게 생각했던 배우들, 또 ‘이만하면 난 그래도 이제 다 된 배우 아닌가’ 했던 배우 수백 명이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없어져 버렸어요. 배우라는 것은 항상 새로운 작업에 대한 도전입니다. 연기에 완성이 없다는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잘할 순 있어도 완성은 아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은 90세의 나이에도 연극 ‘리어왕’에서 200분 공연의 방대한 대사량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찬사를 받았던 그의 삶 자체가 증명한다.

나이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 대우나 받으려는 것은 늙어 보이는 것이다. 한다면 되는 것”이라며 “이제 우리 나이는 닥치면 닥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나는 ‘당장 내일 할 일이 있으니까. 끝을 생각하기보다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지. 팔십이라는 것도 빨리 잊고, 아직도 육십이구나’하며 산다”고 그는 밝혔다. 이런 자세로 그는 70대에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야동 순재’라는 파격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며 젊은 세대에게도 사랑받았고, 80대에는 예능 ‘꽃보다 할배’에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140편이 넘는 드라마에 출연하며, 단역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을 정도의 작품을 남긴 이순재. 그는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뿐 아니라 ‘허준’, ‘이산’, ‘거침없이 하이킥’ 등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는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가 되며 생애 마지막까지 현역으로서의 위상을 지켰다.

1997년 중국에서 시작된 한류는 이제 전 세계적인 문화 현상이 되었다. K-드라마, K-팝, K-무비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흐름의 출발점에 이순재가 있었다. 그가 ‘대발이 아버지’로 중국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순간이, 한국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첫 걸음이었다.

“연기에 완성은 없다”고 말했던 그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더 높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이 멈춘 지금, 우리는 그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류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국민배우 이순재, 그는 한국 대중문화사에 지울 수 없는 이름을 새겼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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