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샌드위치에 갇히다
미·중·일 사이에서 길을 잃은 제조강국 대한민국의 선택은?
수출은 늘었는데, 왜 우리는 더 불안한가
2025년 1월, 한국의 수출액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2025년 연간 수출액은 7,097억 달러로 사상 최초로 7,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무역수지는 78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2017년 이후 최대 규모를 달성했다. 특히 반도체 수출은 1,734억 달러로 전년 대비 22.2% 급증하며 AI 붐이라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이 화려한 숫자 뒤편에 한국 경제가 마주한 불안은 여전하다. 2024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0%에 그쳤다. 전년(1.4%)보다는 나아졌지만, 한국은행의 전망치(2.2%)를 밑돌았다. 특히 4분기 성장률은 0.1%로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이었다. 민간소비는 위축되고, 건설투자는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수출 호황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냉랭하기만 하다.
더 큰 문제는 이 불일치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도체 하나에 의존한 수출 구조,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통상정책, 급격히 줄어드는 생산가능인구. 한국경제는 지금 위기인가, 아니면 구조 전환의 통증인가. ‘샌드위치 경제’라는 오래된 진단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번 기사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국경제가 처한 다층적 압박의 구조를 해부해 보고 변화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샌드위치 경제’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한국경제의 ‘샌드위치론’은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진단이다. 당시 한국은 선진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지 못한 채 중국과 동남아의 저가 공세에 시달리는 ‘낀 경제’로 묘사됐다. 압축 성장을 통해 단기간에 제조업 강국으로 부상했지만, 그 성공 공식은 역설적으로 한계를 만들어냈다.
한국의 산업 구조는 ‘추격형(catch-up) 모델’을 기반으로 했다. 선진국이 개척한 시장에 빠르게 진입해, 더 저렴한 가격과 빠른 속도로 점유율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반도체, 철강, 조선,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은 모두 이 공식을 따랐다. 문제는 추격이 완료된 뒤였다. 한국은 ‘선도자’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과거 샌드위치론은 단순했다. 가격에서는 중국에, 기술에서는 일본·미국에 밀린다는 구도였다. 그러나 2025년 현재, 샌드위치의 구조는 훨씬 복잡해졌다. 기술 격차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급격한 인구 감소, 내수 시장의 한계까지 겹쳐진 ‘다층 샌드위치’ 구조다.
한국은 더 이상 ‘빠르게 따라가는 국가’도, 완전히 앞서가는 국가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다. 이 어정쩡함이 바로 지금 한국경제가 겪는 불안의 핵심이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의 한국
미국은 반도체, AI, 배터리를 중심으로 동맹국들을 자국 중심의 공급망 블록으로 재편하고 있다. 2022년 칩스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단순한 산업 지원이 아니라, 중국을 배제한 기술 동맹을 구축하려는 전략이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지만, 이는 선택이 아니라 강요에 가깝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현지 공장 건설에 각각 수십조 원을 쏟아붓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요구하는 건 투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첨단 기술의 공유, 중국과의 거래 제한, 심지어 생산 데이터까지 미국 정부와 공유할 것을 압박한다. 기술은 공유하되, 통제권은 미국이 쥐는 구조다.
한국의 최대 교역국은 여전히 중국이다. 2025년 대중국 수출은 1,308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18.4%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비중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2018년 26.8%였던 대중국 수출 의존도는 7년 만에 8%p 이상 하락했다.
더 심각한 건 중국의 변화다. 중국은 2016년 이후 자급률 제고에 집중하며 한국산 중간재 의존도를 빠르게 낮추고 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등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던 핵심 중간재 분야에서 중국 자체 생산 능력이 급격히 향상됐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은 중간재 자급률을 높이는 동시에 고부가가치 중간재 수출까지 늘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한국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의존도는 더 높아졌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전체 중간재 수입에서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8.3%로, 10년 전(19.4%)보다 8.9%p 증가했다. 이는 G7 국가들의 중국 의존도 증가폭(평균 0.8%p)보다 11배나 큰 수치다. 이차전지 핵심 소재인 수산화리튬은 83.5%,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산화텅스텐은 94.7%를 중국에서 수입한다.
안보는 미국, 시장은 중국. 이 구도에서 한국은 어느 쪽도 완전히 선택할 수 없다. 과거에는 ‘전략적 모호성’이 통했다. 그러나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서 모호성의 비용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거래를 제한하라고 압박하고, 중국은 한국을 ‘미국의 하수인’으로 간주하며 경제 보복을 시사한다.
2023년 한국은 31년 만에 대중국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환됐다. 반도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품목에서 대중국 수출이 감소한 반면, 중국산 원자재와 부품 수입은 계속 늘어났다. 한국은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첨단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하면서도, 동시에 중국산 핵심 소재 없이는 생산을 유지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에 놓여 있다.
산업구조의 위·아래에서 동시에 눌리는 제조 강국
글로벌 경제는 플랫폼, 소프트웨어, 금융, 표준을 선점한 국가가 가장 높은 부가가치를 가져가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애플, 구글,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미국 기업들은 제조는 하청을 주고 설계와 소프트웨어, 생태계 장악으로 압도적 이익을 가져간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출하량에서 애플을 앞서지만, 영업이익에서는 압도적으로 뒤진다. 애플은 하드웨어를 파는 게 아니라 ‘생태계’를 팔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제조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부가가치 영역은 선진국이 선점했고, 한국은 ‘잘 만드는’ 역할에 머물러 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는 가격과 속도 경쟁에서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과거 한국이 일본을 추격하던 방식 그대로, 이들은 한국을 추격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조선, 철강, 석유화학에서 한국을 추월했다. 전기차 배터리에서도 중국의 CATL은 세계 1위 점유율을 차지하며 한국 기업들을 압박한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는 낮은 인건비와 젊은 인구를 무기로 제조업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중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고 있지만, 이는 한국 내 생산 기반 약화로 이어진다. 기술 격차보다 비용 격차가 더 큰 위협이 되는 시대다.
한국의 제조업은 여전히 높은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량 증가가 곧 이익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 글로벌 가치사슬(GVC)에서 한국은 중간 단계에 위치하며, 위에서는 플랫폼과 표준을 가진 선진국이, 아래에서는 저가 생산으로 무장한 후발국이 이익을 나눠 가진다.
KDI(한국개발연구원)는 한국의 생산성 증가세 둔화가 자본수익성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국내투자가 해외투자로 전환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생산성이 0.1% 하락하면 장기적으로 GDP가 0.15% 감소한다. 기업들은 국내보다 해외 투자 수익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자본을 해외로 빼내고 있다. 이는 국내 경제의 활력 저하로 직결된다.
일본도 한때 샌드위치론의 중심에 있었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겪으며 중국의 추격에 시달렸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다른 선택을 했다. 완성품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고, 소재·부품·장비(소부장)로 산업의 ‘아래층’을 장악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일본은 반도체 메모리 시장에서 한국에 밀려났지만, 반도체 제조장비와 소재 시장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전 세계 반도체 공장은 일본의 장비와 소재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 도쿄일렉트론, 어드밴테스트 같은 장비 회사들과 신에츠화학, JSR 같은 소재 기업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시간’이다. 수십 년간 축적된 공정 노하우는 쉽게 재현할 수 없다. 장기 고용을 통해 숙련 기술자를 유지하고, 그들의 암묵지(暗黙知)를 조직 내에 축적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한국처럼 빠른 성장과 높은 이직률을 추구하는 시스템에서는 이런 축적이 불가능하다.
일본은 저성장 국가다. GDP 성장률은 1% 안팎을 맴돈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샌드위치가 아니다. 소부장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무리 추격해도, 일본의 소재와 장비 없이는 첨단 제품을 만들 수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물론 일본의 선택이 완벽하진 않다. 내수 시장 위축과 고령화로 경제 활력은 떨어졌다. 그러나 산업 포지션만 놓고 보면, 일본은 샌드위치에서 벗어났다. 한국은 여전히 갇혀 있다.
내부 균열: 인구·노동·내수가 만드는 또 다른 샌드위치
외부 압박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국경제는 내부에서도 균열이 확대되고 있다. 인구 구조, 노동시장, 내수 한계라는 세 가지 구조적 문제가 겹치면서 ‘내부 샌드위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이미 2017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2025년 현재,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명대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OECD는 2050년 한국의 생산가능인구가 현재보다 3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다.
문제는 속도다. 일본이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14%)에서 초고령사회(20%)로 가는 데 11년이 걸렸다. 한국은 7년밖에 안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데, 대응할 시간은 더 짧다.
한국 노동시장은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비정규직 간 격차가 극심하다. 대기업 정규직은 과잉 보호되고, 청년·여성·고령 인력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 중소기업은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지만, 청년들은 대기업과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이 이중구조는 생산성 향상을 가로막는다. 혁신은 노동 이동성에서 나오는데, 한국은 한번 들어간 직장에서 평생 버티는 구조가 지배적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창업과 이직이 억제된다.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0%를 넘어 OECD 최상위권이다. 가계는 빚을 갚느라 소비를 줄이고, 내수 시장은 위축된다. 2024년 민간소비 증가율은 1.1%에 그쳤다. 수출이 아무리 늘어도, 내수가 받쳐주지 못하면 고용과 소득이 개선되지 않는다.
한국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너무 높다. GDP 대비 수출 비중은 40%를 넘는다. 글로벌 경기가 나빠지면 한국경제는 곧바로 타격을 받는다. 내수 시장이 취약하면, 외부 충격에 대한 완충장치가 없다.
정책의 한계: 왜 해법은 늘 늦는가
한국 정부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대응책을 내놓는다. 재정 확대, 규제 완화, 산업 육성. 그러나 이런 정책들은 대부분 단기 대응에 그친다. 구조 개혁은 늘 뒤로 밀린다.
정부는 경기가 나빠지면 재정을 풀고, 기업이 어려워하면 규제를 완화한다. 이런 정책은 즉각적인 효과가 있어 보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재정 지출은 빚을 늘리고, 규제 완화는 구조 개혁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
구조 개혁은 누군가의 손해를 전제한다. 노동시장 개혁은 기득권 노조의 반발을 산다. 연금 개혁은 고령층의 저항에 부딪힌다. 규제 개혁은 기존 사업자들의 반대에 막힌다.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 개혁을 회피한다.
‘모두가 조금씩 손해 보는 선택’을 합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국 사회는 합의보다 대립의 정치가 지배적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180도 바뀌고, 일관성 있는 장기 전략은 사라진다.
샌드위치는 운명이 아니다
한국경제가 샌드위치 구조에 갇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해진 운명은 아니다. 하지만 샌드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한국은 그동안 ‘모든 것’을 하려고 했다. 메모리 반도체도, 시스템 반도체도, 자동차도, 조선도, 배터리도. 그러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글로벌 경쟁은 치열하다.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할 수는 없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첫째, 기술 주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술 주권이란 모든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나머지는 전략적 제휴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다. 일본처럼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거나, 특정 공정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둘째, 산업의 무게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제조업 중심에서 벗어나 서비스, 소프트웨어, 플랫폼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제조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부가가치의 중심은 이미 이동했다. 한국은 여전히 ‘잘 만드는 것’에 집착하지만, 세계는 ‘어떻게 팔고, 어떻게 생태계를 만드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셋째, 사람 중심의 성장 구조로의 전환이다. 인구 감소 시대에는 양적 성장이 아니라 질적 성장이 중요하다. 여성, 고령, 외국인 인력을 적극 활용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고, 평생 교육 체계를 강화하며,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경제는 아직 기회가 있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일부 분야에서는 여전히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고, 글로벌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할 기회조차 사라질 수 있다.
샌드위치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지금까지의 전략을 고집하면 샌드위치에 갇힌다. 하지만 과감히 방향을 바꾸면, 새로운 미래와 희망을 만들 수 있다. 한국경제가 지속가능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편하지만 필요한 선택을 할 용기와 이에 대한 국가차원의 깊이 있는 논의와 대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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